1. 개요: 조선의 화가 안견(安堅)이 세종대왕의 셋째 왕자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산수화
1447년에 그려졌고, 비단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려졌음
2. 소장처: 일본 / 학교법인 덴리(天理) 대학 / 중요문화재 제 1152호
3. 특징: ㄱ. 세종과 문종 때의 화가인 안견은 한국 산수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이 그림에는 안견의 독창성이
잘 나타났다고 평가받음
ㄴ. 그림 양쪽으로 안평대군의 제서와 시 1수가 적혀있고, 신숙주, 정인지, 박팽년, 성삼문 등의 당대 20여 명의
찬문이 적혀있는데, 모두 친필이기에 문학사는 물론 서예사로써도 큰 가치가 있음
4. 유출경위: 어떤 경로로, 어떻게 유출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음
ㄱ. 임진왜란 당시 약탈당해, 현재에 이른다는 설
ㄴ. 안평대군이 세상을 떠난 후, 종친 누군가에게 비장되어 전해지다가, 1893년 이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는 설
5. 기록: 현재까지 알려진 기록은 이 그림이 일본 학계에 알려진 뒤 현재의 덴리(天理) 대학으로 들어가기 까지임
=> 몽유도원도를 가장 오래 전에 소장한 사람은 가고시마(鹿兒島) 출신의 '히사시루리' 로, 이 기록은
몽유도원도의 부속 문서인 '감사증(鑑査證)' 에 나와 있음 (1893년 11월에 발부)
=> 몽유도원도는 최소한 감사증이 발부된 1893년 이전에 이미 일본으로 건너가 있었음이 확실
6. 환수기회: ㄱ. 1930년경 오봉빈이 총독부 주관의 '조선 명화 전시회' 에서 출품되어 전형필에게 구입을 권했으나
가문의 가르침, 담제와 길제를 지내 탈상을 해야 후계자로서 아버님이 물려주신 재산을 사용할 수
있어서 기회를 놓침
ㄴ. 1947년경, 국립중앙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김재원(金載元, 1909 ~ 1990)이 일본에 갔을때,
일본의 미술사가 구마가이 노부오가 구입할 수 있다는 말을 건냈으나, 당시 국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 기회를 놓침
ㄷ. 1949년 장석구(張錫九)가 한국으로 가지고 와 판로를 찾은 일이 있음
=> 국립박물관과 최남선(崔南善), 이광수(李光洙), 장택상 등도 그림을 보았으나 3백만 원이라는
다른 문화재급 고미술품보다 10배는 비싼 값에 다시 일본으로 유출
7. 참고: ㄱ. 오봉빈: 호는 우경(友鏡)으로 우리나라 화랑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평안북도 영변 출신으로 상해에서 도산 안창호를 만나 항일 독립운동을 했으며,
3.1 만세운동 직후 서울로 돌아와 체포되어 징역 6년에 집행유예 6년을 선도받음
출옥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동양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로 돌아와
위창 오세창의 권유로 조선미술관을 차렸음
ㄴ. 장석구: 우리나라 골동사를 애기할 때, 약방의 감초 격으로 꼭 따라다니는 사람
해방 후 일본인들이 돌아가며 헐값으로 내놓은 국보급 문화재를 산더미처럼 수집하여
대수장가의 반열에 올랐으며, 부여수리조합공사를 추진하다가 실패하여 많은 빚이 생기자
1948년 남산에서 대전시회를 열어 소장했던 다수의 고미술품을 처분했고, 그것도 모자라
다량의 고서화와 불상 등을 미국에 밀반출해 팔았음
특히, 몽유도원도를 팔고 큰 돈을 번 이후에는 하지(Hodge, J. R) 중장을 찾아가 일본의 명검,
마사무네를 선물하고는 그 대가로 미군전용수송기를 빌려서, 그 동안 한국에 남겨 두었던 모든
고미술품을 이상짐처럼 꾸민 다음 문화재의 해외 반출이 엄격한 때에 아무런 검열을 받지 않고
한꺼번에 일본으로 싣고 갔으며, 지금도 그 수량과 내용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음
8. 출처
ㄱ. <몽유도원도>,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B%AA%BD%EC%9C%A0%EB%8F%84%EC%9B%90%EB%8F%84
ㄴ. <우리 문화재속 숨은 이야기, 고제희, 문예마당>
ㄷ. <간송 전형필, 이충렬,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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